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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명혜주간 제776호 【수련교류】  
   2021-06-24 10:44:57 | 조회 : 442

한글판 제776호



수련교류

‘생사를 내려놓음’에 대한 자그마한 이해 
왜 완고한 집착심은 제거하기 어려운가? 
남을 얕보는 마음이 자신을 가로막다
‘정(情)과 사(私)’에 대한 얕은 깨달음
무엇이 진수(眞修)인지 체험하다 
서양인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당(黨) 문화를 닦아 없애다 
뼛속의 사람 마음과 관념을 제거하고 마난에서 걸어 나오다 
수련교류 발췌 



수련교류



‘생사를 내려놓음’에 대한 자그마한 이해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2006년에 법을 얻었다. 법을 비교적 늦게 얻었기에 어떤 법리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예를 들어 수련 과정에서 가끔 수련생들이 “○○는 지금 생사고비를 넘고 있습니다”, “○○는 생사를 내려놓고 생사고비를 넘었습니다”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럼 무엇이 생사를 내려놓은 것인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생사를 내려놓았다고 할 수 있는가? 잘 이해되지 않아 경문 검색 기능을 이용해 ‘생사를 내려놓다(放下生死)’를 검색해 사존의 관련 설법을 배웠다.

사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약 한 수련하는 사람이 능히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생사(生死)는 영원히 당신을 멀리 떠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일부러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당신이 법 속에서 이 일보로 수련해야만 당신으로 하여금 이러한 생명이 되도록 할 것이다.”[1], “사람과 신(神)의 구별은 바로 여기에 있다. 생사를 내려놓는다면 당신은 바로 신(神)이며 생사를 내려놓지 못하면 당신은 바로 사람이다. 바로 이 구별이다.”[2]

설법에서 사부님께서는 어느 질문에 이렇게 답변을 주셨다.

“제자: 저의 부친은 노수련생이며, 게다가 국외에 있는데도 걸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부: 노력하지 않고 있다. (웃음) 하나는 그가 스스로 명백해질 수 있다면 가장 좋은 것이다. 수련이잖은가. 또 하나는 외부적인 조건이 작용을 일으키므로, 그를 도와주도록 하라. 사악이 어느 날 그에게 나는 당신을 박해하지 않겠다, 당신이 수련하고 싶으면 수련하도록 하라고 알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바로 두려운 마음 때문이다. ‘생사를 내려놓는다’는 말은 누구나 할 줄 알지만, 압력이 좀 크기만 하면 안 된다. 하사(下士)가 도(道)를 듣는 것처럼 하지 말라.”[3]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생사를 내려놓았다고 할 수 있는가? 여전히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이후에 자비로우신 사존께서 여러 수련생의 입을 통해 나를 점화해주셔서 ‘생사를 내려놓은’ 일부 표현을 알게 됐다. 지금 정리해 수련생들과 함께 공유하려 하니 공동제고해 사존께서 요구하신 “신(神)의 정념으로 최후의 길을 잘 걸어가기를 희망한다.”[4]에 도달하길 바란다.

◎ 한 번은 한 수련생이 크게 소업(消業)하면서 구세력의 박해를 심하게 받았다. 자식들의 강요를 견디다 못해 병원에 갔고 의사는 수술을 두 번 해야 한다고 했는데, 생사고비라 할 수 있었다. 나와 몇몇 수련생은 그를 찾아가 함께 법공부하고 그를 도와 발정념을 해줬다. 한 수련생은 그와 교류하면서 “두려워하지 마세요. 생사를 내려놓으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만약 한 수련하는 사람이 능히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생사(生死)는 영원히 당신을 멀리 떠날 것이다.’[1]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후에 이 노수련생은 마음을 굳게 먹고 1천 위안 넘는 약들을 모두 버렸고, 죽어도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당시 이것이 ‘생사를 내려놓은’ 일념이었는지 수련생은 이겨냈고 수술하지 않았다.

◎ 어느 한 번, 나는 수련생 집에 가서 같이 신년 달력을 만들었다. 한 노년 여수련생도 와서 같이 도와주면서 그녀에게서 나타난 기적과 그녀가 어떻게 ‘생사를 내려놓고’ 생사고비를 넘어갔는지 교류했다. 그녀는 말했다. “제 소업 표현은 속인이 말하는 뇌종양입니다. 병원에서는 수술해 종양을 떼어내야 한다고 했지만 저는 절대 안 한다고 했어요. 아들에게 ‘나는 대법제자이기에 대법을 배우면 나을 것이고 수술할 필요가 없어. 이건 고비를 넘는 것인데 만약 내가 고비를 넘지 못한다면 화장터로 보낼지언정 병원으로 보내지 말거라. 약속할 수 있니?’라고 말했고 아들은 동의했습니다. 며칠 후 저는 입으로 대추만한 종양을 토해냈고, 수술하지 않고 종양이 나았어요. 이 목숨은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며 아니면 진작 죽었을 겁니다.”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얼마나 반석과 같이 확고한 믿음인가! 대법을 수련하면 ‘안전’해 낫게 될 거라 말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굳게 다잡고 죽어도 두려워하지 않는 걸 선택했다. 즉 생사를 내려놓았기에 죽음의 신이 물러간 것이다.

◎ 한 번은 인근 현의 50대 여수련생을 만났다. 그녀는 채소를 사다가 우리에게 밥을 해줬는데, 허리가 곧고 얼굴색이 붉으며 윤기가 났다. 이후에 그녀는 이렇게 교류했다.

“제가 지금은 아주 건강해 보이지만 예전에 크게 소업할 때에는 속인의 폐암 말기 가상이 나타났어요. 기침이 심해 숨쉬기도 힘들었고 허리도 90도로 휘었어요. 사부님께서 구해주셨기에 지금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1999년 ‘7.20’ 때 제 아들은 고작 6살이었어요. 우리 세 식구는 사람마다 자전거 한 대를 타고 6일 반 만에 톈안먼 광장에 도착해 법을 실증했습니다. 돌아온 후 사부님께서 큰 복을 주셔서 사업이 아주 잘 됐고, 억대 자산에 미국에도 회사가 생겼어요. 하지만 저는 만족하지 않고 다단계 판매를 시작했으며 인간 세상에 내려온 방향을 잃고 수련도 느슨해졌습니다. 결국 구세력이 누락을 틈타 폐암 말기 가상이 나타났고 멀쩡한 폐가 조금만 남았죠. 수련생이 도와 발정념을 해주어도 효과가 없었고 의사도 치료할 수 없으니 좋은 음식이나 먹으라고 했습니다. 정말 목숨이 위태로웠죠.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그래도 자신이 대법제자라는 걸 기억했고, 사부님만이 저를 구해줄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병원에서 죽으면 중생제도에 영향 주기에 집에 돌아가 사부님께 빌겠다고 결심을 내렸어요. 집에 간 후 마지막 한 가닥 힘으로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 사존의 법상까지 무릎 꿇고 기어갔어요. 그리고는 향을 피우고 사존께 뉘우쳤습니다. ‘사부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재물에 정신이 팔려 다단계를 한 것이 잘못이고 잘못한 것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구세력의 배치를 원하지 않고 죽어서는 안 됩니다. 대법에 먹칠하고 중생제도에 영향 줘서는 안 되기에 법으로 자신을 바로잡을 것입니다. 아직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제가 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기에 이 목숨으로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사부님, 저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세요. 만약 사부님께서 두 번째 생명을 주신다면 이젠 장사를 모두 상관하지 않을 것이고, 일부분 돈을 중생제도에 사용할 것입니다. 남은 돈도 상관하지 않고 이 목숨을 오직 수련에만, 세 가지 일을 하는 데만 사용할 것입니다. 사부님, 저를 구해주시고 잘못을 고칠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잘못을 뉘우치고 소원을 빈 후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생사를 사부님께 맡겼습니다.

결과 2주 뒤에 저는 모두 나았습니다. 병원에 가 검사해보니 두 폐가 모두 멀쩡했고 아무 병도 없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저에게 한 쌍의 새 폐를 주셨습니다. 며칠 후 저는 미국에 갔는데 미국에 있는 사업 때문이 아니라 법을 실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들은 저에게 ‘어머니, 회사를 정말 신경 쓰지 않으실 거예요? 회사 장부도 관리하지 않으실 거예요?’라고 물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래. 전혀 관계하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을 테니 너희들이 관리하거라. 사부님 앞에서 맹세했기에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하고 이제 이 목숨은 오로지 수련에만 속한단다’라고 말했어요.”

수련생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거기에는 사존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한 생명이 숙원을 깨닫고 끝까지 수련하겠다는 감동도 있었다.

이후에 이 수련생은 미국에 가서 직접 사부님을 뵈었다. 그녀는 말했다. “사부님께 하고 싶은 감사의 말이 수없이 많았지만 정작 사부님 앞에서는 머리가 하얘져서 ‘사부님, 안녕하십니까!’라는 한마디만 하고는 눈물을 흘렸어요. 정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사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사람이 만약 생사 이 관을 넘지 못하면 그는 원만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을 결단코 한 번만이라도 아프게 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생사를 내려놓은 것으로 쳐줄 수 없는데, 그것은 다만 형식일 뿐으로 나는 중하게 보지 않으며, 나는 당신의 마음을 보고 진정하게 해낼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본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사람이 세상을 사는 것은 단지 명리를 위해서일 뿐이다. 그가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장래 좋은 직장과 전망(前程)이 있을 수 있고, 그의 봉급도 자연적으로 많을 것인데, 그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보통 사람보다 높을 것이고 일반 사람보다 높을 것이다. 사람은 바로 이것을 위해서 살고 있지 않은가? 여러분 생각해보라. 그가 이것마저도 가지지 않는다면, 그는 이것마저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한 젊은이로서 이런 것마저도 가지지 않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바로 생사마저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5]

법에서 나는 이 수련생이 진정으로 명리를 내려놓고, 명리의 밧줄을 잘라버릴 결심을 내린 후 일심으로 자신을 순정하게 수련하겠다고 한 것이 생사를 내려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부님께 죽고 싶지 않다고,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일체를 사부님의 결정에 따르고, 생과 사 중 어느 것이든 모두 받아들이려 했다. 이것이 바로 생사를 내려놓은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녀가 소원을 빌어 목숨을 유지하려 한 것은 수련과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사심이 없고, 불성(佛性)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사부님께서는 그녀를 도와 새로운 폐로 바꿔주셨고, 그녀도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다. 정말 불법무변(佛法無邊), 불은호탕(佛恩浩蕩)이다.

◎ 어느 한 번, 현지에서 열린 수련교류회에서 한 남성 수련생이 말했다. “남자감옥에 있을 때 저는 단식하며 반(反)박해 했습니다. 6일째 되자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고, 침대에 누워 일어나 앉을 기운조차 없었습니다. 같은 감방에서 가까이 지내던 한 수감자는 저에게 훙사오뉴러우(紅燒牛肉: 쇠고기 요리의 일종) 라면을 여섯 봉지 사줬습니다. 이건 제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라 그가 저보고 먹으라고 하자 정말 마음이 좀 움직였어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계속 단식해 박해를 반대해야 하고, 이 박해를 승인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토록 좋은 대법을 얻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고 살아갈 희망을 버렸고 이불로 머리를 덮은 후 자다가 죽겠다고 결심했어요.

하지만 이튿날 죽기는커녕 정신이 들고 기운이 생겨 걸을 수 있었습니다. 오전 8시쯤 감옥경찰은 저보고 ‘○○, 여기를 떠날 테니 짐을 챙기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어디로 보낼 건데요?’라고 묻자 그는 ‘집으로 보낼 겁니다’라고 말했어요. ‘생사를 내려놓는다’라는 일념으로 인해 사존께서 저를 소굴에서 구해주셨습니다.”

◎ 한 수련생 언니는 말했다. “이전에 납치돼 박해받을 때 사악은 제 두 손을 뒤로 묶은 후 매달아 놓고 때렸습니다. 두 팔이 너무 아파 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어요. ‘사부님,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으니 저를 데려가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죽기보다 못하니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아프지 않았고 아주 편안해졌어요. 그때 제 모습이 어린아이이고 연꽃 위에 가부좌하고 앉아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저는 사부님을 따라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날아갔고, 한 폭포 앞에서 놀았는데 너무 즐거웠습니다. 조금 뒤에 사부님께서 저보고 돌아가라고 하자 저는 ‘돌아가기 싫습니다. 사부님, 인간세상은 너무 고달픕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러자 사부님께서는 나에게 아직 완성하지 못한 사명이 있기에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현실로 돌아왔고, 그때 경찰들이 저를 내려놓고 더 이상 때리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 후 ‘보석’ 형식으로 풀려나 집에 돌아왔습니다.”

◎ 한 기술수련생이 경찰의 추적 박해를 받게 되자 다른 수련생은 그를 자기 집에 데려와 잠시 피하게 했다. 법공부와 발정념을 잘해 상태를 조절하라고 했고 그 기술수련생은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게 됐다.

어느 날, 이 기술수련생은 사존의 법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사부님, 저는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목숨은 원래부터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니 사부님께서 원하시면 가져가셔도 됩니다. 하지만 구세력이 제 목숨을 빼앗아가려 한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고 주지 않겠습니다.”

말한 후 그는 마음을 내려놓고 정념으로 집에 돌아갔다. 정정당당하게 자기 집에 있었지만 악인들이 다시는 그를 찾아와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사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리훙쯔(李洪志)의 제자이다. 다른 배치는 다 필요 없고, 모두 승인하지 않겠다. 그러면 그것들은 감히 하지 못하므로 모두 해결될 수 있다.”[6] 위 두 수련생이 생사를 내려놓은 방법은 모두 위 단락 법에 부합됐다. 그들은 구세력의 배치한 길을 따른 것이 아니라 난 속에서 대법 사부님께 빌고, 자신의 생사를 모두 사부님께 맡겼으며 사부님이 결정하시게 했다. 일체를 사존께서 주관해달라고 빌었기에 생사고비를 넘을 수 있었다.

◎ 몇 년 전, 나와 한 수련생은 같이 대면 진상을 하다가 미행을 당해 납치됐다. 불법적으로 15일 납치됐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 감옥경찰은 우리에게 서명하라고 하면서 어두운 얼굴로 서명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라고 협박했다. 수련생은 위에 ‘×교’라는 두 글자가 있다고 했다. 듣고 나서 나는 마음을 굳고 먹고 수련생에게 말했다. “어찌 됐든 우리는 사존과 대법에 죄송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일체를 사존께 맡기고 다 내려놓읍시다.”

감옥 경찰이 하던 일을 마무리한 후 나는 평온하고 자비롭게 그에게 말했다. “우리가 서명하면 당신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그 순간 나는 무엇이 생사를 내려놓은 것인지 깨달았다. 계속해 박해를 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려놨고, 어떤 결과도 신경 쓰지 않고 모든 걸 사부님께 맡겼다. 생사를 내려놓은 마음과 사심 없이 남을 위한 선한 한 마디는 다른 공간의 사악을 해체시켰고, 감옥 경찰은 “돌아가세요”라고 했다. 나는 즉시 “당신은 정말 착하네요. 복을 받게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우리 둘은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

◎ 천목이 열린 한 수련생은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진상을 알리러 나가야 하는데 머릿속에 나쁜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향을 피운 후 무릎 꿇고 사부님께 빌었어요. ‘사부님, 이토록 더러운 생각을 갖고 어찌 사람을 구할 수 있겠어요? 사부님께서 제자의 이 더러운 생각을 깨끗이 제거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람을 구하러 나가야 하고, 많은 중생이 제도받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발정념을 했어요.

조금 뒤, ‘쾅’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천막(天幕)이 열렸어요. 눈을 뜨고 보니 금빛 찬란한 천국세계가 눈앞에 펼쳐졌고, 션윈의 첫 번째 프로그램과 같은 장면이 나타났습니다. 수많은 불도신(佛·道·神)이 있었는데 다들 머리 위에 광환이 씌워져 있었고, 사존 머리 위에는 아름답고 채색 빛이 나는 거대한 광환이 있었습니다. 사존께서는 큰 연화대 위에 서 계셨고 창공 꼭대기에 나타나셨습니다.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누가 나를 따라 세상에 내려가 조사정법을 하겠느냐?’ 이때 일부 신들은 과감히 머리 위의 광환을 버리고 사부님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고, 어떤 신들은 두리번두리번 좌우를 살폈습니다. 그때 우리 네 명, 즉 저와 당신, 숙모와 L언니는 모두 함께 내려왔고, 정말 신의 광환을 버리고 대단히 큰 담력으로 내려온 것을 보았어요.

이때 머릿속의 나쁜 생각들이 사라지고 아주 순정해졌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줄곧 반 시간 동안 저에게 보여주셨고 저는 내내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비로우신 사부님께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자신이 생사를 내려놓은 이야기를 들려준 수련생들에게 감사드린다. 사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대법제자는 책임이 있는 것이며, 어쨌든 간에 모두 당신이 세간에 온 서원(誓願)을 완성해야 하는바, 이것은 당신이 애당초 신(神)의 생명으로 보증을 했기에 비로소 오늘날 이 우주의 가장 위대한 생명 ― 대법제자가 된 것이다.”[7], “사실 걸어 나오지 못하는 그러한 사람들은 이런저런 구실을 대지만, 모두 두려운 마음을 덮어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려운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수련자가 사람과 신으로 구별되는 증거(見證)이자 수련자와 속인의 구별이며 또한 수련자가 제거해야 할 최대의 사람 마음(人心)이다.”[8]

법 속에서 우리는 최후일수록 마음을 더 가다듬고 시간을 아끼며, 수련을 첫 자리에 놓고 법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교란을 배제해 법공부를 많이 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법공부를 하며, 문제에 부딪히면 우선 자신에게서 찾아 진정으로 착실하게 자신을 닦아야 한다. 그럼 시시각각 사부님과 대법의 보호 속에 있기에 안전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발정념으로 자신을 속박하는 것들을 타파한 후 나가서 사람을 구해야 한다!

우리 대법제자들은 마땅히 사존 말씀대로 정념정행하고 정진해 수련해야 한다. ‘생사를 내려놓고’, 마음속에 중생을 품으며, 나가서 진상을 알리고, 정정당당하게 대법제자다워야 한다. 그래야만 사존께서 우리를 위해 감당하신 일체를 저버리지 않고, 중생의 기대와 법을 위해 온 우리 신의 생명을 저버리지 않게 된다!

층차 수준이 제한돼 있기에 법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길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2004년 뉴욕국제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미국법회 설법-뉴욕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9-2009년 대뉴욕국제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3-삼계 내에서 정법을 교란하는 데에 참여한 일체 난신(亂神)들을 전면적으로 해체하자’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스위스법회 설법’
[6] 리훙쯔 사부님 경문: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7]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3-유럽법회에 보냄’
[8]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3-법공부를 잘하면 사람 마음을 제거하기 어렵지 않다’




왜 완고한 집착심은 제거하기 어려운가?


글/ 일본 대법제자

[밍후이왕] 사람마다 수련과정에서 모두 제거하기 어려운 집착심이 있다. 한 층을 제거하면 또 한 층이 있는 느낌이다. 어떤 집착심은 몇 년간 의식하지 못했고 제거하려 하지 않았기에 그것은 끊임없이 커졌다. 심지어 한 층의 신체가 형성됐고 우리 수련의 길에서 용맹정진을 가로막았다. 우리가 끊임없이 그것을 분간하고 그것을 제거해야 그것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최종적으로 모든 집착심을 제거해야 진정으로 사람에서 벗어날 수 있다.

1. 완고한 집착심과 관념이 형성된 원인

사람은 칠정육욕(七情六慾)이 있고 속인 사회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상처 입는 것을 피하고자 점차 각종 집착심과 관념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혹은 성장 과정에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자신에게 한 세트 판단 기준을 만들어주어 점차 일종 관념이 형성됐다. 어떤 것은 심지어 너무 강해서 어떤 사람이 이 관념을 건드리면 즉시 반발하거나 고통스러워 감당하기 어려워한다. 사실 바로 그 관념이나 집착심이 반항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실한 생명이고 그것이 죽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사람 몸에 작용하는데, 이것이 당신에게 준 느낌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다른 공간에서 이 몸체는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는데, 이 몸에 오르면 이 불상은 곧 대뇌가 있게 되며, 사상이 있게 되지만, 오히려 신체는 없다. 다른 사람도 가서 절을 하는데, 절을 하고 절을 하여 그것에게 일정한 에너지를 줄 것이다. 특히 연공(煉功)하는 사람은 더욱 위험한데, 절을 하기만 하면 점차적으로 그것에게 에너지를 주어 그것은 곧 유형(有形)적인 신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 유형적인 신체는 다른 공간에서 형성된다.”[1]

우리가 수련으로 걸어 들어가더라도 어떤 특정 상황에서 집착심이 생길 수 있다. 막 생길 때는 비교적 약하지만, 만약 우리가 법으로 판단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것을 닦아버리지 않으며 나타날 때마다 우리가 이런 생각에 따라 생각하면 그것을 강화하고 점차 그것에게 에너지를 주게 된다. 최종적으로 다른 공간에서 한 층의 유형적인 신체가 형성된다. 사실 어떤 집착심이든 모두 같고 단지 집착하는 과정과 대상이 다를 뿐이다. 여기에서는 단지 병업관 사례를 들어 분석해보겠다.

예를 들면 수련생이 병업 가상에서 만약 일반적인 감기 증상이라면 두렵지 않고 두려운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생명의 안위에 영향 주는 증상이거나 신체가 격하게 고통스러운 등 괴로운 표현이 나타나면 두려움이 나온다. 왜냐하면, 그 병업의 표현은 매우 진실하고 괴로운 느낌은 속인의 증상과 똑같기 때문이다. 이때 사람 속에서 형성된 경험과 관념은 작용을 일으킨다. 사상 속에서 그에게 이렇게 되면 위험하다고 알려주거나 아마 어떤 병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사실 관념이 그의 대뇌에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수련인으로서 만약 법에 서서 인식하지 않고 사람과 같은 인식이라면 이 생각에 따라 생각하게 되어 두려움이 커지고 이로 인해 한 층의 신체가 형성된다.

밍후이왕 교류 문장 ‘두려운 마음을 제거하다’의 글쓴이는 두려움은 한 층의 투명하고 유리 같은 ‘신체’라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매번 두려움이 한번 나타나면 심장 위치에서 한 층의 회색 안개가 뿜어져 나와 신체를 감싸는 것을 보았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는데 이런 완고한 집착심과 관념이 한 층의 ‘신체’라는 것을 더 생생하고 진실하게 알게 됐다.

형성된 이 층의 관념, 집착심은 일종 업력의 체현이고 사부님 말씀처럼 당신을 괴롭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끊임없이 그것에게 에너지를 보충해주면 그것이 강대해져 반대로 그것이 당신을 통제한다. 그것은 당신이 마음속으로 괴롭고 짜증 나게 하며 당신 몸에도 괴로운 증상이 나타나게 한다. 사실 모두 이 층의 ‘신체’가 한 짓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지 않으려 하고 살려고 하기에 당신을 괴롭게 하고 두렵게 하며 당신이 그것에게 굴복당하게 한다. 이로써 그것은 생명이 연장되고 당신을 통제하는 목적에 도달한다.

2. 법리로 가늠하고 완고한 집착과 관념을 제거

완고한 집착심과 관념이 이미 한 층의 신체를 형성한 것을 명확히 알았다면, 그가 또 반영되어 나와 당신 신체에 작용할 때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어떤 수련생은 괴로우면 피동적으로 변하고 아주 괴롭다고 느낀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람의 이치로 판단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여태껏 마음과 신체의 괴로움이 자신의 괴로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수련인으로서 마땅히 속인을 넘어선 인식으로, 법리로 판단해야 하지 않는가? 집착심이 나와 당신을 괴롭게 하면 마침 그가 반영돼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것이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는 표현 아닌가?

우리는 가부좌에서 다리 아픈 것이 소업이라는 것은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면 이 집착심이 반영되어 나와 우리가 괴로워할 때는 왜 가부좌 중 소업처럼 대하지 못하는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사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물질과 정신은 일성(一性)이다.”[2] 그러므로 마음속에서 집착해 반영되어 나오는 걱정, 두려움, 짜증 등은 마음속으로 괴로워하는 반응이다. 우리는 마땅히 가부좌 중 소업처럼 그것을 제거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어야 하고 다른 형식의 소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 신체 속에서, 시간이 길어지자, 당신의 형상과 똑같은 당신이 누적되었는데, 오히려 그것으로 구성된 것으로, 당신을 통제했다. 그것은 아주 강한 집착으로 구성된 당신의 형상이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그렇게 강하게 당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강한 마음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3]

사람으로서 그것에게 통제당하지 않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수련인으로서 초범적인 이치로 자신을 요구한다면 더는 그것에게 통제당하지 않는다. 매번 집착심이 나올 때 귀찮아하지 않고 그것을 배척하고 그것을 해체해야 한다. 그것이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비로소 반영되어 나왔다는 것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반영되어 나오지 않으면 우리는 발견하지 못한다. 이것은 좋은 일이고 그것을 제거하는 기회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의 말대로 당신이 그것을 갖지 않겠다고 하여 그것이 바로 죽어버린다면 이는 너무나도 쉽다. 당신이 그것을 똑똑히 분별할 수 있는 동시에 당신 자신이 강건해지고, 깨닫게 되어 그것의 포위망을 뚫고 나오면 갈수록 강대해지지만, 그것은 갈수록 약해지고 소실되어 최후에는 소멸하여 버리는데, 이는 과정이 필요하다.”[4]

나는 완고한 집착과 관념을 의식하지 못해 이미 커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한 층의 신체를 제거하려 생각하면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결심과 항심(恒心)으로 우리가 끊임없이 이 층의 신체를 제거하면 그것은 갈수록 작아지고 갈수록 커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줄곧 우리가 완전히 그에게 통제되고 이끌려 가지 않을 때가 그것이 소멸할 시각이다.

3. 법공부와 발정념은 완고한 집착과 관념을 제거

나는 한 수련생을 알고 있다. 그해 그녀는 다리에 갑자기 통증이 나타났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수련생은 그녀에게 가상이라고 알려줬다. 하지만 이런 고통은 확실하게 그녀 몸에서 표현됐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진정하게 이것이 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녀도 그때 자신이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다. 어떻게 하는가? 이렇게 강렬한 두려움을 어떻게 제거해야 하는가? 그녀는 마음먹고 매일 법공부를 했다. 그녀는 그때 두려운 마음이 올라오고 각종 부정적인 마음을 통제하기 어려울 때 스스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남편도 옆에 없었기에 그녀는 고립되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껴 아주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법공부만 했다. 하지만 법을 내려놓으면 즉시 두렵기 시작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법공부를 하고 하루에 침대에 앉아 6시간 법을 배웠다. 마침내 3개월이 지난 후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사라졌고 걸을 수 있게 됐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 전에 그녀는 억지로 침대에서 내려와 걸었지만, 가슴이 찢어지는 통증을 느껴 매번 부들부들 떨다가 그만뒀다. 대량의 법공부를 통해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는 그녀를 도와 그 층의 두려움의 신체를 제거해주셨다. 그녀는 이전의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회복했다. 여기서 법공부의 중요성을 알게 됐고 사부님 말씀이 실증됐다. “법은 일체 집착을 타파할 수 있고, 법은 일체 사악을 타파할 수 있으며, 법은 일체 거짓말을 타파해 버릴 수 있고, 법은 정념(正念)을 확고히 할 수 있다.”[5]

발정념을 강화하는 것도 자발적으로 완고한 집착을 제거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밍후이왕 교류 문장 ‘두려운 마음을 제거하다’에서 글쓴이는 다른 수련생을 도와 발정념하는 과정에서 그 층의 두려운 마음으로 형성된 유리 같은 신체가 발정념 과정에서 부스러진 것을 보았다. 이것은 발정념의 위력이 강대하다는 것을 실증한다.

완고한 집착심과 관념은 그리 두렵지 않다. 우리가 끈질긴 마음으로 그것을 제거한다면, 우리가 끊임없이 그것을 분간하고 제거할 수 있다면 최종적으로 그것을 벗어나고 해체할 수 있다.

이상은 이 층차에서 깨달은 것이고 법에 있지 않은 점은 자비로 지적해주시기를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뉴질랜드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2019년 뉴욕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오스트레일리아법회 설법’
[5]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2-교란을 배제하다’



남을 얕보는 마음이 자신을 가로막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남을 얕보는 마음이 사실 자신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인은 최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만약 우리가 남을 얕보면 남이 자신의 수련에서 얻은 것을 사심 없이 우리에게 나눠 줄 때, 우리는 잠재의식에 상대방이 깨달은 것이 그리 대단치 않고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기에 남의 좋은 면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둘째, 만약 우리가 남을 얕보면 남이 우리의 문제점을 제기해 줄 때 우리는 무시하고 진지하게 남의 의견을 듣지 않아 제때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지 못하고 제고하지 못한다.

남을 얕보는 마음은 아마 잘난 척하는 데서 나오거나, 질투심에서 나오거나, 또 당(黨)문화에서도 나올 수 있다. 안으로 더 찾으면 아마 많은 집착심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남을 얕보면 자아가 팽창되어 결국 자심생마(自心生魔)를 초래할 수 있고, 또 우리가 정체를 이루지 못하게 하며 수련생 사이에 간격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을 얕보는 이 나쁜 마음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개인적인 약간의 체득이고 부족한 점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로 시정해주시기 바란다.



‘정(情)과 사(私)’에 대한 얕은 깨달음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수련에서 배회하는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었지만, 그 원인을 몰랐다. 나는 어떤 한 상태를 돌파하지 못해 수련에 문제가 생겼음을 인식했다. 마성도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고(평소에 이끌리지 않으려고 억지로 참지만, 상대방이 너무 지나치다고 느끼면 화를 냈다) 주변의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참지 못했다(주변 사람들이 기본적 도덕관이 없다고 느꼈다).

물론 이기적인 요소가 있고, 또 기본적으로 모두 자신의 이기적인 요소로 인해 조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면 사람의 관념과 집착심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 주변의 여러 가지 일들 모두 수련에 좋은 일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고비를 하나씩 넘기지 못해 쌓여서 조성되었고, 그 속에서 사악이 교란과 파괴 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다. 교란 속에서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시간이 오래 흐르자 정말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어제 법공부할 때 도대체 자신의 어디에 큰 문제가 있어 그런 것인지? 사부님께 제자에게 점화(點化)해 주시기를 부탁드렸다.

사부님께서 제자가 확실히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제자가 용기가 없어 감히 인정하려 하지 않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치 않음을 보시고 방할해 주셨다. 오늘 ‘전법륜’에서 “진정하게 고층차(高層次)로 사람을 이끌다”를 공부할 때 갑자기 법 속에서 점화를 느꼈다. 당시 정말 매우 홀가분했는데 마치 사람에게 지혜를 불어넣어 깨닫게 되듯이 탁 트이고 밝아졌다.

문제는 ‘정(情)’이 너무 많아서였다! 수련자에게 ‘정’이 너무 많은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며 오히려 나쁜 일이다. 한마디로 말해 ‘정’이 많으면 ‘사(私)’도 그만큼 많다. 무겁게 짊어진 불필요한 ‘정’은 바로 수련자의 집착심이다.

아마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가짜 나인 ‘정’을 자신이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예를 들면 속인 중에서 ‘정’이 많은 사람은 남녀의 ‘정’을 위해 투신하는 예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좋게 생각하지만, 사실 세간에서 사랑에 눈 먼 남녀‘정’은 이성적이지 못하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사실 모두 사심(私心)을 위한 것이다. ‘정’에 사로잡혀 남을 해치고 자신도 해친다. 물론 수련자는 비록 속인 사회에서 수련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정(情)’감을 숭상하고 죽음으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전통적인 부부의 은혜에 따라 인과관계에 순응하고, 함께 화목하게 지내며, 서로를 격려하고 함께 진정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한가지 예를 들면, 육친‘정(情)’은 정말 친(親)인가? 이것이야말로 세인을 가장 현혹한다. 왜인가? 육친‘정’이 너무나 깊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까지 깊은가? 누군가 자신은 육친‘정’이 얕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얕지 않고 매우 깊을 때가 많으며 자신은 매우 얕다고 느낄 뿐이다. 사실 그 속에서 상처받았지만, 슬픔이나 원한을 품고 복수하려는 마음은 없을 뿐 진정으로 이런 집착을 내려놓아서가 아니다. 속인의 속담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며 친연(親緣)을 말하지만, 실은 세상 사람들이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철벽이다.

물론 세상의 다른 모든 것도 사람을 현혹하지만, 왜 육친‘정’이 남녀의 ‘정(情)’보다 더 세상 사람을 현혹한다고 할까.

왜냐하면, 오늘날의 변이된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육친‘정’은 여전히 가깝고, 가족 몇 사람만이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남녀‘정’은 변이된 사회에서 세간의 남녀가 이렇게 많은데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전통을 따라 늙을 때까지 함께 할 수 있을까? 라며 딴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비교적 많다.

만약 수련자가 육친‘정’에 집착하면 수련을 망칠 수 있고, 담담하게 보면 그 방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수련자도 분별하지 못할 때가 있다. 많은 수련자도 육친‘정’으로 인해 공든 탑이 무너졌다.

현대사회의 변이는 이미 사람의 무의식중에까지 변이된 상태에 가 있다. 모든 사람이 변이되고 있기에 이 모든 것은 변이된 ‘정’감을 만들고, 수련자도 이 ‘정’의 집착에 대해서 흐리멍덩해졌다. 어떤 사람은 ‘정’이 죽지 않고 매우 교활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일에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것이며 자신은 집착이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법리로 안에서 찾아보면 천천히 밑바닥을 볼 수 있다. 역시 자신을 위하고, ‘정(情)’과 ‘사(私)’를 잃고 싶어 하지 않고, 누군가 자신에게 특별히 잘해주는 것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다. 더욱이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 물질적 향락과 몇십 년 인간사회에서의 행복과 즐거움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고생을 하고 싶지 않고, 명성과 이익에 손해 보고 싶지 않으며, 자신을 변화하기는 더욱 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나를 위하고, 가짜 나를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만약 동기가 정말로 완전히 남(어느 한 사람이 아니고 더욱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자비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결코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분노하지 않으며, 화내지 않는다. 만약 조금이라도 불순하면 아무리 그 사심을 감추더라도 가장 근본적인 집착을 건드리기만 하면 ‘사’든지 ‘정’이든지 폭발한다. 마음을 움직여 화내고 분노하며, 심지어 보복까지 하려는데 아주 끔찍하다. 마도(魔道)에 들어가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며, 또 업(業)을 지을 수 있다. 당연히 정법시기의 대법제자로 되지 못한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회와 도덕관념하에서 자효모애(子孝母愛)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고, ‘정(情)’이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오늘날의 사회는 너무나 많이 변이되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함을 어리석다고 여기며 이를 조장한다. 사람마다 자신을 보호하는 일에 당당하며 부끄러운 줄 모르고 드러내며 자랑으로 여긴다. 자신을 위하는 마성의 표현은 젊은 층의 패션으로 자리 잡으면서 독특한 개성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칭송받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어떤 일이 실제로 자신의 이익과 연루되면 무슨 육친‘정(情)’, 남녀‘정’은 말할 나위도 없이 포기한다. 이익과 직면하면 정의를 위해 용감하게 나선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감에 충만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충성해야 하는지, 왜 효를 해야 하는지, 왜 은혜를 갚아야 하는지, 왜 사람으로 되어야 하는지, 왜 자비를 갖추어야 하는지, 현대인들에게 이런 가치는 한낱 웃음거리가 된다. 그렇지만 겉으로 표출하는 파괴로 갈증은 해소되지 못해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은 탈출구를 찾고 있다. 그래서 최근 몇 년 동안 절에서 향을 태우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졌는데, 얼마나 유용한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정’이 있으면 ‘사’가 있고, ‘사’가 있으면 ‘정’이 있다. ‘사’가 있으면 어떻게 자비심이 나올 수 있는가. ‘정(情)’이 있으면 자비심이 더욱 나올 수 없다. 적어도 닦지 못한 부분은 자비심이 없고, 마성이 나올 때는 자비심이 나올 수 없다. 자비심은 ‘정’이 아니고 ‘정’을 초월하는 것이다. 자비심은 억압적이지 않고 누구를 특별하게 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자비심은 모든 것을 녹일 수 있다.

수련자의 금기는 자신이 어떠어떠하다면서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이다. 사실 누구도 특수하지 않고, 무슨 특수한 것도 없기에 진심으로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기본 경지이자, 수련자가 명백히 알아야 할 이치이다. 이 마음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추구하는 수련으로 되는데 이것은 필연적이다.

수련을 여러 해 동안 하면서 지금에 와서야 수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수련은 자신을 닦는 것이지 남에게 보여주려고 닦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써서 거울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란다. 허스.



무엇이 진수(眞修)인지 체험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이전 수련 과정에서 남편의 무례함과 나에게 조성한 가정 마난을 대할 때 ‘물론 이 일은 그가 잘못한 것이지만 나는 수련인이므로 가장 큰 흉금으로 그를 포용하고 선으로 감화시켜야 한다’고 항상 생각했다. 그래서 줄곧 참으려고 노력했고 최대한 그에게 잘해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가 난폭하게 나오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늘 말싸움을 하게 됐다.

지금은 관념이 완전히 바뀌었다. 남편이 무엇을 했건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나 이곳이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그가 그렇게 할 수 있고 나 여기의 바른 에너지가 크지 않아서 그가 그런 나쁜 것에 통제당한 것이었다. 관념이 바뀌자 나도 새로운 우주 생명의 아름다움을 느꼈고 나쁜 것은 다 나 자신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가장 좋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좋은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심도 더없이 당당하고 홀가분함을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진정한 아름다움이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옳은 것은 그이고 잘못된 건 나이니 다툴 게 뭐 있느냐”[1] 이전에 나는 보수적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이 완전히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다만 나에게 집착이 있다고 느껴야 자신에게 꼭 잘못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그릇된 일을 하면 나는 언제나 자신이 바르다는 전제하에 자신의 집착을 찾았고, 타인의 잘못에 대해 일종 참고 견디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내심으로는 자신이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다는 우월감을 느꼈다. 이런 심태는 심리적 용량에 제한을 초래했고 일정 정도 이상 쌓이면 바로 폭발했다.

마음에서 우러나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임을 알았을 때 지금은 남편에게 화를 낸다는 것이 전혀 가능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이해와 선(善)이 사람 마음의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었으며, 진정한 자비와 선으로 대할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마음에서 우러나 나를 존경했다.

과거에 그가 감히 그렇게 나를 대한 것은 이전에 나의 심성이 너무 낮아서 그가 날 깔보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현재 그는 나의 앞에서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단속하는데 나의 높은 경지에 대한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우리의 심성이 아주 높을 때 주위 생명은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순응하는바, 어떠한 속인의 방법으로 개변시키거나 단속할 필요가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전에 나에게 있었던 또 다른 문제를 발견했다. 누군가 자신의 구체적인 집착심을 지적할 때, 맞게 말하면 받아들이고 감사를 드렸다. 하지만 상대방이 근본적으로 나를 부정할 때에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본질적인 이익을 고수하며 개변하려고 하지 않는 것임을 또 알게 되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만약 수련하는 사람이 단지 표면상으로만 내려놓고 마음속에는 아직도 지닌 채, 한 가지 것을 고수하면서, 당신 자신의 그 가장 본질적인 이익을 다른 사람이 해치지 못하도록 고수하고 있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바 그것은 가짜 수련이다!”[2]

나는 또 알게 되었다. 만약 자신이 근본적으로 바르다고 생각하고 표면적으로만 어느 한 집착심을 버린다면 위에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가짜 수련과 같은바, 진정한 수련생이라고 볼 수 없다. 사실 대법의 내포는 무한히 높고 깊은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이다. 위의 한 층에서 볼 때 아래 한 층은 틀린 것이다. 법 속에서 끊임없이 높은 층차로 돌파하는 수련생으로 놓고 말하면, 고층차에서 볼 때 우리가 현재 처한 층차의 일체는 모두 틀린 것이다. 더 나아가 수련의 마음가짐 역시 철저하게 바뀌었는데, 내심으로부터 자신의 잘못과 좋지 않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매번 법공부할 때 이제는 자신이 이미 정한 관념으로 법공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층 높은 층차에서 볼 때 지금 이 층차는 모두 틀린 것이기 때문이다.

법 속에서 정진하자, 구하는 모든 마음을 내려놓았고 더는 원만 하려는 강렬한 마음도 없으며, 대법 속에서 아름다움을 얻으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끊임없이 대법에 비추어 자신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층층에 있는 자신의 좋지 않은 것을 보아내고 자신을 수련하며 그 한 층 법에 동화했다. 동화한 후 다시 법공부할 때 또다시 자신의 본질적인 그런 좋지 못함을 보아내고 또 그 한 층의 법에 동화했다. 또 법공부하고 자신의 근본적으로 좋지 않은 것을 찾아내고 다시 자신을 수련하여 법에 동화했다……

동시에 다른 한 가지 인식도 철저하게 개변되었다. 주변 수련생들이 서로 자신의 좋지 않은 것을 말할 때 사실 이것은 수련의 길에서 정진하는 것이다. 반대로 수련생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은 마도(魔道)를 걷는 것으로, 이때는 조심해야 한다.

지금은 수련생들을 보는 마음가짐도 완전히 바뀌었다. 더는 수련생들을 3, 6, 9등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잘 수련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수련생이 나의 문제를 지적할 때 나는 늘 듣기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을 가장 낮은 위치에 놓을 수 있어 어느 수련생이 지적해주든 열심히 듣고 사고하며 안으로 부족한 부분을 찾았다. 다른 사람을 얕잡아 보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우주 중에서 수련인은 심리적으로 마땅히 자신을 가장 낮은 위치에 놓아야 함을 알게 되었다.

몇 년간 넘어지고 일어나는 시련을 겪으면서 지금에 와서야 진정한 수련인의 상태를 알게 되었다.

개인의 일부 수련 체득이므로 부족한 부분은 여러분들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 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 ‘홍음3-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2] 리훙쯔 사부님 저서: ‘북미 제1기 법회 설법’



서양인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당(黨) 문화를 닦아 없애다


글/ 해외 대법제자

[밍후이왕] 저는 미국에 온 지 이미 10년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당(黨) 문화를 닦아 없애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서양인 남편과 2년 넘게 살면서 갈수록 자신의 몸에 제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당 문화가 수없이 많이 배어 있다는 것을 갈수록 알게 됐습니다.

1. 생활예절

먼저 간단한 기본적인 생활예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를 들어 옷차림이라면, 저는 겉치레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은 아니지만 혼자 집에 있을 때, 특히 지난해 전염병 발생으로 인해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부터 저는 거의 홈웨어를 입고 재택근무를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매일 아침 식사를 한 다음 출근할 때와 같은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고 다시 앉아서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머리카락도 정성껏 손질했습니다.

매일 식사할 때, 반드시 테이블 냅킨을 펴고 접시를 냅킨 위에 놓아야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식사할 때, 우리는 영원히 음식을 각자 따로 담아서 먹습니다. 처음에 제가 자신이 사용하던 젓가락으로 직접 접시에 담긴 요리를 집어서 곧바로 자신의 입으로 넣으면 남편은 이상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남편에게 “당신은 제가 이렇게 식사하는 모습이 좀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물어보자 남편은 “아, 난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남편이 흔히 사용하는 비교적 완곡한 표현 방식입니다.

저는 밥을 비교적 빨리 먹습니다. 한편으로 먹으면서 머릿속으로 일부 다른 일들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본 남편의 모습은 밥을 천천히 먹으면서도 가끔 심호흡하며 눈을 감고 음식의 맛을 자세히 음미합니다. 이는 사실 한 매 한 가지 일을 중요시하는 것이며 심지어 존중하는 것으로 식물을 존중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우리 중화민족 전통문화에서 의식을 가장 존중하는바 중국의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 전통 6예(六藝) 중 ‘예(禮)’ 자가 첫 번째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설 명절을 쇠면 황제는 군신들을 거느리고 천지에 경의를 표하는 예절의식을 행합니다.

가끔 저는 전화를 걸면서 스피커폰으로 설정해놓고 자신이 잘 들리는 것만 생각하고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이것도 제가 자주 범하는 나쁜 습관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비교적 긴 시간이 걸리거나 중요한 전화일 경우, 모두 이어폰을 끼고 문을 닫고 저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저는 남편과 한 가지 문제를 명확히 이야기하고 싶어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음량이 커집니다. 남편은 곧 서둘러 저를 가로막으면서 화를 내지 말라고 말합니다. 저는 자신이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설명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이 보기에 이미 비교적 격동돼 있고 평화롭지 않은 모습입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중국인들이 곳곳에서 말할 때 큰 소리로 떠들고 큰 소리로 외치는데, 사람들은 대륙에서는 습관이 되었지만, 국제사회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는 고쳐야 한다. 그렇지만 대륙인의 형상은 확실히 세계에 이러한 인상을 조성했고 국외의 중국인들 모두 아주 창피하고 아주 망신스럽다고 여긴다. 그러나 당신은 아는가? 중공사당은 오히려 이런 것을 중국인에게 알려주지 않고 사람들에게 바른 것을 가르치지 않으며, 의도적으로 세인들에게 중국인이 이러하다는 것을 보게 한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형상을 훼손하려 하고 당신의 존엄을 파괴하려 하는데, 사람 스스로는 알아차리기가 아주 힘들다. 내 생각에, 아마 나올 기회가 많아지면 이 사회가 다르다는 것을 천천히 느낄 것이고 천천히 주의하게 될 것이며, 역시 좋아질 것이다. 양성된 습관은 정말로 제거하기가 매우 어렵고, 사람들에게 쟁투하라고 가르치는 당문화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격조차 변하게 했다. 단번에 폭발되어 나와야 비로소 통쾌해하는 성격, 중공사당이 가르친 이런 것들을 고치지 않으면 정말로 안 된다.”[1]

2. 언어체계 속의 당 문화

저는 남편과 언어를 배우는 환경에서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영어를 잘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함께 한 이 2년 동안 저의 엉터리 영어는 자주 틀릴 뿐만 아니라, 이 오류 뒤에는 사실 당 문화의 사고가 있어서 한 말은 늘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의 감정을 등한시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면, 상대방이 제게 무엇을 물어볼 때 저는 싫으면 항상 “no(아니요)”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비교해보면 저는 마치 상대방을 부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대답은 “전 괜찮아요. 필요하지 않아요. 감사합니다.”입니다.

또 예를 들어 이 음식은 제가 먹을 필요가 없으니 당신은 그것을 다 먹어도 된다고 말할 때, 저는 “you can…(당신은…을 할 수 있어요)”라고 자주 말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남편은 제게 가르쳐주면서 “you are welcome finish it(당신이 다 드셔도 좋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좋아요”와 “당신은…을 할 수 있어요”라는 하나는 상대방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 명령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또 있습니다. 저는 “you should(당신은 해야 합니다)”, “do you understand(당신은 아시겠습니까)?”라고 자주 말합니다. 남편은 제게 “have you tried to…(…하려고 해보셨습니까)”, “Am I making sense(제가 의미가 통하게 말했나요?)”라고 사용할 것을 조언했습니다. 존중을 말하면 남편은 식사할 때, 제게 요리를 담아 주거나 제게 무언가 필요하지 않은지 물어볼 때 “Do you mind…(…해도 될까요)”라고 말합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난 조금도 개의치 않는데 이렇게 좋은 일을 내가 왜 mind(언짢아) 하겠는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슨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저는 “Do you mind…(…해도 될까요)”라고 의사를 묻지도 않고 직접 남편의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너무 놀라서 뒤에 숨어버렸습니다.

저는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면 다른 사람에게 강요했고 행위가 거칠었습니다. 이것도 존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게다가 한 가지 일에 대한 견해를 표현할 때, 저는 자주 “it’s not good(이건 좋지 않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에게 있어서 “it’s not good”이란 표현은 자신의 표준으로 타인에게 정의를 내리는 것이며 자기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타인도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으면 “I don’t like it(나는 마음에 들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남편이 직접 “I don’t like it”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남편은 비교적 완곡한 단어로 표현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매 한 가지 사물과 사람에 대한 존중이 담겨있는데, 자기 주관을 그렇게 강하게 돋보이게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저는 남편에게 넥타이 하나를 사줬습니다. 남편은 아마 그 무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남편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직접 말하지 않고 이 넥타이에 대한 호감은 시간이 좀 걸린다고 말했습니다. 잠시 후, 남편은 또 자신이 이 넥타이에 대한 호감이 커지고(growing)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매우 감동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에는 사실 자신에게 수구 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타인이 어떠한지는 자신이 분명하게 잘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타인이 어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 속인의 관념과 업력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어 말하고 나면 곧 업을 지을 수 있습니다.

한번은 남편 앞에서 한 사람을 불평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자신이 매우 완곡하게 말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반쯤 듣고 나서 곧 제게 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저는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남편은 이것은 질투심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저는 서방의 정상적인 사회 문화 속의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다른 사람을 좋게 생각하고 좋다고도 말하며 자신을 높이지 않고 타인을 비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타인을 쉽게 의심하지 않고 한 가지 문제의 신빙성을 구할 때, 증거를 따지고 비교적 이성적으로 문제를 가늠합니다. 그들은 사람을 비교적 온화하고 선량하게 대합니다.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이야기를 할 때, “why not(왜 못해요?)”과 같은 문구를 자주 사용하며 반어문을 즐겨 사용합니다. 사실 여기에는 깊은 쟁투의식이 있지만 사실 예전에는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신은 왜 드나드는 김에 문을 닫지 않아요?”와 같은 문구에는 질책과 원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남편과 처음 서로 만났을 때, 제가 본 상대방의 가장 큰 집착은 다른 사람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점이었습니다. 나중에 이유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역으로 자신을 보니, 저는 일에 부딪히면 늘 밖에서 찾았습니다. 우리 수련인의 요구에 따라 진실하고 선량하며 관용이 있도록 행한다면 걸핏하면 다른 사람과 싸우지 않을 것이고 기어코 언어로 상대방을 압도시킴으로써 심리적인 만족감을 얻지 않을 것입니다. 쟁투 언어의 배후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 중국공산당의 투쟁철학이 빚어낸 일종의 우쭐거리고 열등감이 섞여 있는 왜곡된 인격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서양인은 종교와 사회 문명의 인도하에 대부분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겸손하고 공손하며 예의 바르고 양보하는 태도로 말을 하며 사회는 비교적 온순한 상태에 있습니다.

3. 부정적인 사고

남편과 함께 지내면서 제가 가장 마음에 드는 남편의 장점은 바로 남편은 영원히 긍정적인 사고를 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만약 “오늘은 정공(靜功) 가부좌하는 데 매우 아프네요.”라고 말하면 남편은 “아주 잘 됐어요. 작은 아픔은 자그마한 좋은 일이고 큰 아픔은 엄청난 좋은 일이잖아요.”라고 말합니다. 만약 남편이 업무상에서 한 더미 업무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 같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에 부딪힌다 해도 저는 남편이 한 마디 원망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남편은 “또 무언가를 배웠네요.”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산책을 나설 때, 남편은 문을 잠근 적이 없습니다. 남편은 나쁜 사람이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는 더욱 잠그지 않으며 잠그지 않는 것은 물론, 차에서 떠날 때, 차 열쇠까지 의자에 놓아두고 떠납니다. 저라면 ‘이것은 도둑을 위해 준비해주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한 번은 여행 갔을 때, 한 박물관을 둘러보았고 남편이 전문가용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사진을 촬영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니다가 남편은 제 카메라가 왜 보이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저는 듣자마자 순간 머리가 멍해지면서 마음속으로 ‘망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괜찮아요. 내가 아래층 안내대에 가볼게요.”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분명 그곳에 있다고 믿었고 당황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남편은 카메라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과연 어느 관광객이 주워서 안내대에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그때 저는 감동하였습니다. 서방 정상적인 사회에 있는 개인들의 문명이 사람을 감동케 했습니다. 사회가 모두 이러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게다가 남편의 그런 태연함, 조금도 잃어버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역시 일종의 신사신법(信師信法)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법리적으로 모두 자신의 것이면 잃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도 수련인의 일념은 매우 큰 같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부님의 시사가 생각났습니다. “속(俗)과 성(聖)은 한 갈래 냇물 사이이고 진(進)과 퇴(退)는 두 하늘이라”[2]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이나 악념이 떠오를 때, 대응되는 세계 또는 공간은 암흑천지가 될 것이며 긍정적인 사고나 선념이 나올 때면 불광이 널리 비추고 맑게 갠 하늘이 만리(萬里)에 이를 것이라는 점을 깨우쳤습니다. 전혀 다른 경지입니다.

자신이 일에 부딪혔을 때를 생각해보면 늘 나쁜 쪽으로 생각했고 먼저 다른 사람을 경계했습니다. 당 문화 사회에서 천지신명을 믿지 않고 하늘의 이치를 믿지 않으며 도덕적인 구속이 없는 거대한 환경에서, 적대시하고 경계하는 심리는 사람들의 잠재의식 속에 습관적인 사고로 자리 잡았으며 타인을 경계하는 것이 사회의 정상적인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마치 최대한 경계해야 안전하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사실 서양인의 정상적인 상태를 본 후,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정서는 모두 선천적인 순수하고 진실한 본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공자의 ‘논어(論語)’에는 “군자가 공경하되 실수가 없고 사람들과 사귀되 공손하고 예의가 있다면 사해 안의 모두가 형제다(君子敬而無失,與人恭而有禮,四海之內皆兄弟也)”라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는 전통문화에서 제창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입니다. 사람은 주변 사람과 형제처럼 지내야 합니다.

저는 최근 중국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를 했습니다. 가족은 “지금 공산당은 전통문화 복원을 제창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전통문화의 핵심은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믿는 것이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4. 타인을 통제하는 습관

본래 제가 타인을 통제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일부 사소한 일에서 오히려 ‘속셈’이 드러났습니다. 예를 들면, 차를 타거나 남편이 운전할 때, 저는 조금도 한가롭지 않았습니다. 남편에게 천천히 운전하라고 하고 잠시 후, 남편에게 이쪽저쪽, 앞뒤를 보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직접 “내가 운전하고 있으니 볼 거예요.”라고 말했지만 저는 이 걱정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좀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눈을 감고 남편이 운전하게 했습니다. 눈을 감고 ‘나는 왜 이 걱정을 하는 걸까?’하고 반성해보았습니다. 남편을 신뢰하지 않고 전반적인 국면을 장악하려고 했습니다.

또 예를 들면 한 번은 우리 두 사람이 소파를 들고 방 밖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저쪽을 들라며 누가 앞에서 걷고 누가 뒤에서 걸을지와 동선이 어떠한지 지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난 남자예요(말의 숨은 뜻은 함부로 지휘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사존의 시사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여인은 드세고 날카로운데다 난폭하고 경박하고 신랄한 말투로 주인노릇까지 하네”[3]

이 같은 언행은 사실 타인의 일언일행을 모두 자신의 허용 범위 내로 장악하려는 중국공산당의 사악한 ‘통제’ 유전자를 체현하고 있습니다. 배후는 여전히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독선입니다. 저는 서방사회의 환경에서 사람마다 모두 자기 일을 잘하는 것을 중시하고 개개인은 자신의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능력이 있고, 업무 관계를 바로 세우고 타인을 존중하는 것을 이야기하며, 심지어 타인이 지나치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맺음말

가족 수련생이 한 면의 거울처럼 가까운 곳에서 제게 존재하는 당 문화의 사고를 비추어 보여준 것에 매우 감사드립니다. 당 문화가 없는 가정환경에서 저는 화목함과 홀가분함, 부부가 서로 손님을 대하듯이 존경하는 것을 체득했습니다. 아울러, 당 문화가 우리 중국인에 대한 장기간의 독해가 일상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체득했습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2016년 뉴욕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3-일념(一念)’
[3]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3-음양반배(陰陽反背)’



뼛속의 사람 마음과 관념을 제거하고 마난에서 걸어 나오다


글/ 산둥 대법제자 롄펑

[밍후이왕] 최근 나는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아래 가슴이 막히고 붓고 통증이 있는 마난을 넘었고 구세력이 설치한 “목숨을 앗아가는 큰 관”에서 걸어 나왔다. 관을 넘는 중에 끊임없이 법공부하면서 단호히 신사신법하면 넘지 못하는 난과 관이 없다는 것을 한층 더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에 감격했고 교류문장을 쓸 줄도 모르지만, 사부님에 대한 은혜를 표현하기 위해 남편 수련생의 도움 아래 억지로 이 한 단락 경험을 써내어 사부님에 대한 나의 은혜를 표현하고자 하며 수련생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1. 구세력이 만든 마난

나는 결혼 전에 가슴이 막히고 붓고 통증이 있는 병증이 있었는데 재발할 때 가슴 쪽에 딱딱한 것이 막고 있어 위아래로 트림을 하지 못하고 방귀가 나오지 못하고 위로 떠받쳐서 뒷등 뼈까지 모두 아팠는데 고달픔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결혼한 후 매번 재발할 때마다 남편이 안마해 주거나 혹은 주먹으로 뒷등을 두들겨서 완화해주었다.

1997년 나는 파룬따파 수련에 들어선 후 얼마 안 가 연공장에서 사부님께서 나의 신체를 정화해주시는 것을 선명하게 느꼈고 사부님의 등뼈 조정을 통해 허리가 아픈 질병이 나았다. 심장에 피가 모자라고 가슴이 막히고 붓는 증상과 생리통 등 질병도 모두 사라졌다. 이때 나는 진짜로 대법이 나에게 건강한 신체를 준 것을 느꼈고 병이 없어 온몸이 홀가분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위대하시고 자비로운 사부님에 진심으로 감사했고 나는 수시로 사부님의 은덕에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어느덧 20여 년이 지나갔고 올해 정월 보름 전후로 가슴이 막히고 붓는 현상이 또 한 번 습격해왔다. 처음에는 나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3월에 이런 현상 갈수록 빈번해졌고 나는 구세력의 교란임을 인식했고 발정념으로 그것을 제거했다. 그러나 무슨 선명한 효과가 없었고 3월 20일 좌우에 증상이 더 심해졌다. 나는 사부님의 진수제자이고 법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며 더는 과거처럼 주먹으로 두드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4월 초에 가슴이 막히고 붓는 것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다 전에는 손으로 가슴 쪽을 만져보면 딱딱한 것이 만져졌고 그것이 뒷등 뼈까지 받치고 있었는데 통증으로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가슴 안쪽에 무엇이 뜨겁게 달궈진 것 같았고 여러 가지 맛이 담긴 병이 뒤집혀 각종 쓰고 달고 시고 매운 맛들이 모두 있는 것 같았지만 무슨 맛인지를 말할 수 없었다. 토하고 싶어도 토하지 못하고 변을 보아 내보내고 싶어도 안 되었다. 억지로 참고 머리는 소파에 기대고 소파에 꿇어앉았고 고통스럽게 견뎠다.

나는 이것은 구세력이 업력을 이용하여 명을 앗아가려고 온 것임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초기에 나는 또 자신에게 경고했다. 나는 사부님의 진수제자이고 반드시 대법의 요구에 따라 이 관을 넘을 것이다. 또한 대법의 법리에 따라 안을 향해 찾을 것이다. 찾고 찾아도 한 무더기 집착이 눈앞에 나타난 것을 느꼈다 무슨 고생을 싫어하는 마음, 무슨 이익에 집착하는 마음, 무슨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할 때 입 열기 부끄러워하고, 간식을 좋아하는 마음 등등 모두 솟아 나왔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집착이 주도적 작용을 일으켰는가?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방향을 이미 거의 잃어갈 지경이었고 중심을 잡지 못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충격 하에 신사신법의 정념도 그다지 강하지 못했고 인생이 이미 막바지에 이른 것 같았다. 전에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 아마도 결과가 나올 거예요.” 남편은 나의 이 말의 뜻을 알아들은 것 같았고 내가 정념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고 나와 교류했지만 나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남편에게 등을 두들겨달라고 했고 가슴을 막고 있는 그 “기”를 두드려서 없애려고 했다. 그 순간에 또 그것을 “기”로 여겼고 다시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2. 법공부를 강화하고 안을 향해 찾다

한참 두들긴 후 나는 조금 나은 느낌이 들었다. 남편은 이 기회를 잡고 계속 나에게 “정념을 견지하고 사부님께서는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는 대법에서 이탈할 수 없다”는 화제를 교류했다 나는 그런 “수련하고 안 하고는 나 자신의 선택이고 누구도 결정할 수 없다”는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남편의 건의에 우리는 수련의 길에 들어선 후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아래 하나 또 하나의 일들이 생각났다.

그것은 10여 년 전의 일이다. 나는 퇴근하여 집에 돌아가는데 반드시 지나는 길에 집 철거하는 공사 현장을 지나갈 때 서까래 한 개가 높은 곳에서 나의 머리를 향해 덮쳐왔다. 피할 새도 없이 나의 뒷머리를 습격했다. 현장 사람들이 모두 너무 위험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나의 정념이 충족했고 사부님께서 나의 이 관을 막아주셨고 나는 살갗 하나 긁히지 않았다. 주변의 근로자들은 파룬따파 사부님께서 나를 보호하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모두 파룬따파에 대해 칭찬했다.

더 위험한 것은 저녁에 곧 등이 켜질 때 우리 세 명은 타지역에서 돌아왔다 나와 언니는 앞에서 걸었고 남편은 뒤에서 5, 6m 떨어져서 걸었다 전혀 방비가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내 뒤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고 무슨 물건이 층집 꼭대기에서 떨어졌고 뒤에 있던 남편이 마침 위를 향해 보며 입으로 외쳤다. “누가 층집에서 아래로 물건을 던져요? 왜 한마디 말도 없어요?” 층집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려보던 그림자가 즉시 숨어버렸다. 우리는 그 당시 깨달았다. 이는 사부님께서 또 한 번 우리를 보호해주신 것이었고 사부님께서는 매 시각 모두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를 보고 계시며 보호하고 계셨다. 우리에게 한번 또 한 번 겁난을 피하게 하셨고 평안을 얻게 하셨다. 우리는 사부님에 대한 존경과 감은은 갈수록 깊어졌고 어떠한 말로도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에 대한 감격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오늘을 보면, 수련의 길에서 나는 또 난관에 부딪혔고 밖을 향해 찾는 것은 수련하는 사람을 놓고 말할 때 긍정코 맞지 않는 것이며 안을 향해 찾아 원인을 찾지 못해도 가끔은 좀 나아지면 자신이 맞게 깨달은 것으로 여긴다. 가끔은 또 참기 어려운 고통이 또 나타났을 때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어찌하여 또 왔는가? 도대체 내가 또 제대로 못 찾은 것인가?” 이 참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나는 여러 번 사부님께서 구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사부님, 제자가 우둔하여 마난에 부딪쳐도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자를 깨닫게 해주세요?” 그러나 오히려 사부님의 점오를 받은 느낌이 없었고 나도 계속 자신의 오성이 낮다고 자책하는데 바로 이 자책과 조급함 속에서 갑자기 다른 공간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머릿속 깊은 곳에서 온 것인지 기묘한 생각이 나온다. 내가 찾지 못하는 이것이 바로 원인이 아닌가?

그렇다면 원인을 찾지 못하는 이 원인이 무엇인가? 식사하고 잠자며 법공부하고 나가서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면서 나는 모두 생각한다. “나 이것은 무슨 원인인가?” 이 기간 식사도 비정상이고 형식적으로 응대하며, 특히 야간에는 괴롭힘으로 인해 깨어나고 사부님 설법 녹음을 들을 때도 생각한다. “이는 무슨 원인인가?” 사부님께서 설법 녹음에서 나의 마음의 매듭을 풀어줄 한마디 가르침이 나타나기를 얼마나 듣고 싶었던가! 신체는 하루하루 허약해지고 또한 점점 피곤함이 느껴졌지만, 여전히 원인을 찾지 못했다.

3. 뼛속의 사람 마음과 관념을 제거하고 마난에서 걸어 나오다

한번은 “전법륜”을 읽을 때 사부님의 한 단락 법이 마음속에 들어왔다. “우리 신체가 갑자기 불편함을 느낄 것인데, 이는 업을 갚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여러 방면에서 체현될 것이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당신에게 또 진짜도 아니고 가짜도 아니게 만들어 주어, 이 공이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수련할 수 있는지 없는지, 도대체 수련하여 올라갈 수 있는지 없는지, 부처가 있는지 없는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당신으로 하여금 분간치 못하게 한다. 장래에 다시금 당신에게 이런 정황이 나타나게 할 것이며 당신에게 이런 착각을 조성해 주어, 당신으로 하여금 그가 마치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 가짜처럼 느끼게 하는데, 바로 당신이 견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본다. 당신은, 당신이 꼭 견정불이(堅定不移)하다고 하는데, 이런 마음이라면 그때에 가서 당신은 정말로 견정불이할 수 있으며, 당신은 자연히 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의 心性(씬씽)이 이미 제고되어 올라갔기 때문이다.”[1]

나는 마음속으로 즉시 느꼈다. 내가 수련을 시작해서 사부님께서는 한 시각도 나를 떠난 적이 없었다. 지금 사부님께서는 바로 내 곁에서 보고 계시며 나의 정념이 증가되고 심성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이 특수한 정황에서 법에 대해 진짜로 단호한지를 고험하고 계신다! 나는 즉시 두 손으로 입장하고 말했다. “사부님 제자를 믿어주세요. 저는 반드시 마지막까지 단호할 것이고 사부님께서 마음을 놓으세요.” 그 후 증상이 크게 호전되었다.

또 한번은 팀에서 단체로 “전법륜” 제8강을 공부할 때 사부님의 “기”에 대한 논술이 나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강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그러면, 다시 말해서 기가 있다면 병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연공인(煉功人)인데, 연공하는 사람이 기를 가져서는 뭘 하겠는가? 자신의 신체는 정화가 필요한데, 어찌 또 혼탁한 기를 가지겠는가! 정녕코 가질 수 없다.”[1] 기를 가지는 것은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고 사부님께서는 이미 고층차로 밀어주셨는데 나는 또 자신을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층차에 놓았다. 나는 반드시 미혹에서 걸어 나와야 하고 내가 한층 제고하는 것을 가로막는 근본 원인을 파내야 한다. 하여 나는 “전법륜” 통독을 강화했고 사부님 설법 녹음을 듣는 동시에 또 관련 장절에 따라 배우고 자신을 찾았다. 또 자신의 많은 부족한 점을 찾았다. 예를 들어 개인 이익을 따지는 마음, 자신이 괜찮다고 여기는 마음, 개인 표준으로 남을 가늠하고 수련생을 평가하기 좋아하는 등등이다. 특히 “기”에 대한 인식에서 자신의 이런 상황은 바로 “기”에 막혀 양쪽이 통하지 않아서 조성된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20살이 채 안 되어서 지금까지 계속되었고 체내에 이미 50여 년간 은폐되어 있었고 확실히 하나의 관념을 형성했는데 바로 이 사람의 관념, 그것은 또 사람 표면의 이 한층 껍데기를 형성했다. 이 한층 껍데기의 보호 아래 나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스러운 밤낮을 보내게 했는가. 얼마나 많은 고통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염두가 생기게 했는가. 바로 그것이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이 20년이 넘는 수련에서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와 감당으로 나는 무슨 고통을 느끼지 못했고 또한 나의 “병”이 나아졌고 대법을 수련하여 좋아졌다고 여겼다. 사실 모두 사부님께서 나를 위해 감당하신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 법에서 제고하여 주동적으로 이 관념을 제거하여 나타난 개변이 아니었다. 이런 보기에는 진리의 “가짜 이치”에서 저도 모르게 또 변이된 관념이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파룬따파를 수련하여 나의 병이 나아졌다” 이런 신성한 결론 속에는 “위사” “위아”의 요소가 들어갔다. 사실 만약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가 없었다면 내가 어찌 이 몇 해 동안 이렇게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깨닫고 나는 자신이 보잘것없고 이기적임을 느꼈다. 내심에서 그렇게 엄중한 “자아”와 “자아감”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나의 그 “나를 핵심으로 하는 이기적 관념”이 생명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고 생명의 미시적인 곳에 있었고 “진아(真我)”에 스며들고 있었다. 내가 법에서 법을 인식하는 것을 교란하고 있었고 내가 수련에서 정진하고 제고하는 것을 영향주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나를 위해 감당하신 것을 모두 나 자신의 제고로 여겼는데 이것이 바로 그 “가짜 나”의 소행이 아닌가? 나는 온종일 “경사경법”을 외쳤지만, 나의 존경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여기까지 깨닫고 마음속으로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잘못한 것을 느꼈고 사부님의 불은호탕에 죄송했다. 나는 즉시 며칠 동안 지속해서 발정념했고 자신의 이런 사람 마음과 사람의 관념을 제거했고 사부님을 따라 최후의 정법수련의 길을 잘 걸어가기로 했다.

4월 15일 좌우 연속 이틀 위로 토하고 아래로 설사했는데 토해낸 것은 모두 시큼하고 맵고 뜨겁고 아주 냄새 맡기 힘든 액체들이었다. 나는 신체의 홀가분함을 한층 더 느꼈고 나는 자신이 제대로 찾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후 비록 또 몇 차례의 경미한 반복이 있었지만, 나는 이것이 사부님께서 신체의 깊은 곳에서 나에게 이런 타락 물질들을 제거해주시고 한층 더 신체를 정화해주심을 알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저는 또 한 번 안을 향해 찾는 것이 법보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가격없는 보배를 잘 이용하여 최후의 정법수련에서 정진하고 실질적으로 수련할 것입니다. ”

문화수준과 현재 층차의 제한으로 또 한 번 사부님의 가르침과 구도에 감사드리며, 법에 입각하지 못한 부분은 수련생들이 자비롭게 시정해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수련교류 발췌


교류 과정에서 주요 책임자의 한마디 말이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녀는 “우리가 수련인으로서 자신의 법공부를 위해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법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스스로 견지할 것이며 조금도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업무에 적용할 수 없을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이 말을 떠올리다가 저는 문득 크게 깨달았습니다. 알고 보니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심성 경지는 늘 “비록 다른 사람이 잘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나는 해야 한다”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녀가 설명한 경지는 “다른 사람이 어떠하든지 막론하고 전혀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내게 미치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양자는 겉으로 보기에 비슷해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제가 마음속으로 “비록 다른 사람이 잘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나는 해야 한다”라고 생각할 때, 다른 사람이 행한 것이 어떠한지를 앞에 두고 있기에 본 것은 모두 타인의 부족함이며 그 중, 비교하고 평형을 이루지 못하며 억울해하는 마음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무엇을 해야 하면 싱글벙글하며 하고 자신이 대법제자로서의 책임과 비할 바 없는 영광을 알고 있어 기분이 밝고 즐거운 동시에 법공부를 하든지, 사람을 구하는 항목에서 일하든지, 사부님께서 하라고 하신 어떠한 일이든지 막론하고 결국에는 이로움을 받는 사람은 모두 자신이라는 점을 법에서부터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은 법리상에서 인식한 높이, 그 높이만큼 할 수 있었다. 당신들이 한 일체는 모두 당신들 자신에게 한 것이며 절대로 나에게 해준 것이 아니다.(웃음) 이렇게 말하자. 오로지 사부가 당신들을 돕고 있으며 당신들은 사부를 돕지 않았다.(박수) 장래에 당신들이 그 진상을 볼 적에 ‘와, 원래는 이러하였구나!’라고 할 것이다.”(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그래서 저는 마음속으로 묵묵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표면적인 분업에서 자신의 일인지 여부를 막론하고 부족함이나 누락된 부분을 보기만 하면 자신에게 그것을 보완할 책임이 있으며 의존하는 마음을 제거하고 자신에게 예술적인 천부적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일을 충분히 완벽하게 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관념을 없애야 한다고 자신을 일깨웠습니다.

뜻밖에도 이삼일 내에 주변 환경은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같은 팀의 다른 동료들은 제가 갑자기 매우 바빠진 모습을 보고 잇따라 자발적으로 물어보면서 도왔습니다. 저와 그 수련생 간의 간격도 마치 거대한 빙산이 갑자기 녹아버리듯 며칠 만에 풀어졌습니다. 꽤 오랫동안 마음을 나누지 않은 우리는 또 예전처럼 매우 자연스럽게 수련에서의 제고와 인식을 교류했습니다. 업무에서도 뚜렷한 변화가 생겨 수치의 성장 폭이 몇 주 연속 신기록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몇 개월에 한 번씩 기업의 협찬을 받을 기회가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매주 모두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정말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하신 말씀과도 같았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전 공장의 정신 면모를 모두 이끌었으며, 공장의 경제효율도 좋아졌습니다.”(전법륜)

저는 마음속으로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이 가득 차올랐습니다. 저는 이것은 정말 사람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법의 힘으로 다시 한번 제 생명 과정에서 진실하게 펼쳐 보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수련 중에서 당신은 허다한 마난(魔難)에 부딪힐 것이다. 오로지 여러분이 참답게 법을 배우면 어떠한 난이든지 당신은 넘길 수 있으며, 당신이 오로지 참답게 법을 배우면 그 어떤 풀기 어려운 마음속의 매듭, 넘기지 못하는 것도 모두 법 중에서 답을 찾을 수 있고, 풀 수 있을 것이다. 이 한 부의 법, 그는 어떻게 사람이 되고, 어떻게 천인(天人)이 되는가를 포함하고 있다. 또 나는 여러분에게 어떻게 해서 불(佛)·도(道)·신(神)이 되고 더욱 높은 경지 중의 신이 되는지를 알려주는데, 그가 당신 마음의 매듭을 풀어주지 못하겠는가? 그가 당신의 사상을 열지 못하겠는가? 그가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겠는가? 다 할 수 있다.”(북미 제1기 법회 설법)
—‘매체 항목에 참여한 수련체득’


그런 갈등은 모두 시험이며 당신이 이 환경에서 정진해 착실히 수련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 당신의 확고함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공평하다고 느끼는지를 막론하고 오로지 안으로 찾아 진정하게 제고해 올라와야만 출로가 있습니다. 수련생의 교류는 제게 크나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저는 다른 항목을 떠올리던 생각이 완전히 끊어내고 확고하게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서서히 저는 무엇이든 우연한 것이 아니며 기왕 동시에 생겨난 것은 분명 생생세세에 업력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이 기회를 이용하시어 저를 소업하고 제고해 올라오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깨달은 후, 저는 수련생에게 매우 강한 관념이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불공정함에 부딪히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겨도 상대적으로 쉽게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서서히 저는 자신의 용량이 확장되고 선(善)도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나중에서야 저는 고비를 넘길 때 저의 선하지 않음도 다른 수련생에게 상처를 주며 상대방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타인의 당문화적인 행위를 견딜 수 없지만, 이것이 한 면의 거울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을까요? 이는 제가 자신을 수련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으로 흔히 자신에게 같은 문제가 있었지만 제 눈은 줄곧 타인의 문제를 보면서 안으로 찾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숙으로 나아가 사명을 완수하다’


한동안 한 청년 수련생과 교류할 때 그녀는 “우리가 예전에 춤을 출 때, 어떤 사람은 동작이 좋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연습했고 누구보다도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결국 여전히 정확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녀가 정확한 것에 따라 연습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어떤 사람은 완벽하지 않으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디에 문제가 생겼고 어떻게 해야만 옳은 것인지 잘 생각해본 후, 다시 연습하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표준에 도달하게 돼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한 말은 저를 매우 감동케 했습니다. 우리는 항목에서 법을 실증하고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일사일념, 일언일행이 법에 있지 않으면 또 어떻게 법을 실증할 수 있을까요? 사상이 순정하지 않으면 해낸 일이 어떻게 힘 있게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항목에서 수시로 자신의 문제를 찾아보고 법으로 바로 잡으며 오로지 자신을 잘 수련해야만 비로소 사람을 구하는 사명을 더욱 잘 완수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일에서 일사일념을 닦다’


사실 스스로 줄곧 사부님께서 대법제자에게 부여해주신 역량을 과소평가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정법하고 계시고 대법제자는 조사정법하며 대법제자가 한 일은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대표하며 이것이 바로 역량의 원천입니다. …… 다시 발정념을 할 때, 마음이 훨씬 안정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치 높은 곳에서 굽어보면서 태연자약하게 우주 중의 쓰레기를 청소하고 있는 동시에 자비롭게 우주 중의 중생이 구원받는 모습을 바라보는 듯했습니다.

이제 저는 매번 발정념을 하기 전 모두 한번 생각해봅니다. 자신과 법과 사부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자 정념의 힘은 “힘으로 산을 가를 수 있고”(각 지역 설법 11-2010년 뉴욕법회 설법)에 그치지 않으며 “우주 중의 일체 사악을 초토화하는 유아독존(唯我獨尊)의 기세가 있어야 한다.”[정진요지3-정념(正念)], “‘멸(滅)’자를 강대하게 하되 우주 천체처럼 크게 하며, 일체의 공간을 포함하지 않는 곳이 없고 누락된 곳이 없도록 한다.”[정진요지3-정념(正念)]였습니다. 구세력은 층차가 얼마나 높든지 막론하고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대법제자야말로 조사정법의 주인공이며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주신 것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능가하니 우리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념의 역량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수련의 길은 확실히 매우 좁습니다. 사부님께서 최신 설법에서 ‘틈새’를 언급하셨습니다. 제 개인적인 수련체득은 당신이 진수(真修)하려면 대법을 첫 자리에 놓고 수련을 첫 자리에 놓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업무, 생활 속의 여러 방면을 포함해 정말 잘 해내기가 어렵습니다. …… 수련에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사실 휴대폰 소프트웨어 설치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밍후이왕에서 항상 휴대폰 안전문제를 강조해왔습니다. 당신은 수련을 첫 자리에 놓았을까요? 아니면 업무, 생활, 가족, 사장, 친구의 불평과 화를 첫 자리에 놓았을까요? 업무에서 상사가 당신에게 거짓을 꾸미라고 하면 당신은 어떻게 할까요? 아이가 학교에 다니는데 붉은 스카프를 매게 하고 각종 서명을 하게 하며 사악의 ‘제로화 행동’ 등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까요? 여러 방면의 이런 일들은 많고도 많습니다. 당신이 명리정 심지어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는지 여부를 보고, 당신이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대하는지, 당신은 대법에 따라 하는지 아니면 속인의 방법을 혼동해서 하는지를 봅니다. …… 어떤 수련생은 아마 자신은 여러 방면에서 대법에 따라 했으니 이 사회에서 생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역시 신사신법이며 진수와 무신론 관념을 타파하는 문제입니다.
—‘진수하려면 대법을 첫 자리에 놓아야 한다’


이른바 ‘제로화’ 행동에서 진수(真修)하는 대법제자는 정념정행(正念正行)하면서 서명을 거절했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교란하는 관계자들에게 여러 각도에서 대법의 진상을 알리면서 구세력이 조종하는 이 한 차례의 박해를 부정했습니다. …… A수련생은 정념정행해 사악한 ‘제로화’ 행동의 박해를 타파한 후, 대법제자가 박해를 받아온 20여 년간 어떤 하급 경찰관, 지역사회, 향진 업무 종사자들은 아직 맹목적으로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박해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들의 행위는 이미 법을 위반했지만 스스로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우리 대법제자가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자비로운 선념으로 현행 법률, 법규를 결합해 그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려주고 그들이 법을 위반한 부분을 알려줌으로써 그들에게 결과를 깨달아 대청산 시 역사로부터 도태되는 것을 방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은 물론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하는 사명을 완수하지 못해 수련에 회한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정념으로 사악한 ‘제로화’ 행동을 해체하다’


우리가 진상을 알릴 때, 중공이 어느 해에 무너질지 추측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는 중공이 곧 멸망하니 서둘러 탈퇴하라고 말하는 것도 단지 세인에게 경고해 알려주는 것일 뿐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것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런 예언은 수련하는 대법제자에게 있어서 사실 모두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수련의 길의 필수적인 미혹이며 수련은 절대 미혹을 타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부님께서 그 해 ‘매화시 후 3단 해석’을 하신 후, 안에는 소련의 해체, ‘6.4’ 학살, 대법홍전 등의 정확한 예언은 우리의 수련의 신심을 강화해주셨고 그 후 20여 년간 미래에 대한 각종 더 많은 착오적인 예언은 또 수련인의 마음에 대한 일종 시험이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경험과 교훈은 충분히 많습니다. 만약 어느 날에 한 가지 예언을 보게 된다면 당신은 흥미롭다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그것에 의해 이끌리게 될까요? 저는 대법제자는 마땅히 미래의 예언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말아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수련생들은 중공의 어느 총리에 대해 집착했고 사악한 공산당 회의에 대해 집착했으며 2008년 올림픽에 대해 집착해 큰 손실을 조성했습니다. 그해 매우 많은 수련생이 사악한 공산당의 올림픽은 열리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새 둥지’가 무너지기를 바랐고 일부 천목 소견 장면과 관련해서 미신하기도 했다가 결국 2008년 현지에서 박해를 가장 심하게 받았습니다. 오늘날까지 일부 수련생이 아직 이런 것에 집착한다면 구세력은 보고도 교란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 진정하게 수련이 잘 되어 있는 수련자는 무엇을 예언하거나 타인의 무슨 예언에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아직 예언에 흥미를 느낀다면 당신은 아마 사람의 마음이 아직 매우 중하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 자체적인 제고는 본래 그런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사람에게 진상을 알려 삼퇴를 권유하는 것이야말로 정도(正道)이며 비로소 진정하게 사람을 구한 것입니다.
—‘대법제자는 예언에 흥미를 갖지 말아야 한다’


최근 법공부를 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사존께서 ‘논어’에서 하신 말씀에서 매우 분명하게 잘 설명됐습니다. “인류가 세간에서의 대법의 표현에 대해 마땅히 있어야 할 경건과 존중을 체현할 수 있으면, 사람과 민족 혹은 국가에 행복 또는 영예를 가져다줄 것이다.”[정진요지-논어(論語)] …… 이 말씀에는 내포가 매우 큽니다. 구체적인 진상 알리기에서 구체적인 개인, 그가 관심이 있어하는 개인과 가정의 행복 등 사상 상태를 겨냥해 “대법을 존중하면 복을 받는다”라는 이 말을 적용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간략하면서 이해하기 쉬우며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의미에도 부합하므로 아마 알맞을 것입니다. “대법을 선하게 대하면 복을 받는다”보다 표현이 더 적절합니다. …… 저는 아래와 같은 함의로 이해했습니다. (1) 대법제자 또는 수련생은 대법에 대해 마땅히 경건해야 하고, 세인으로서 대법에 대해 마땅히 존중해야 합니다. (2) ‘존중’이라는 단어는 매우 적절하며 속인이 대법에 대한 태도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설명했으며 대법은 마땅히 존중을 받아야 하고 존중받는 자의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존중’이라는 단어가 더욱 걸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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